40대의 나이에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체류한 한 여행가의 진솔한 경험을 바탕으로, 중년 이후의 삶을 보다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단순한 관광을 넘어, 낯선 곳에서의 생활과 사람들, 그리고 자신과 마주했던 시간들을 깊이 있게 들여다봅니다. 이 글은 단지 여행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있는 인생의 연대기입니다.
여행이 아닌 삶의 방식으로서의 장기 체류
여행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우리는 보통 짧은 휴가, 사진 속 풍경, 잠시 머물다 돌아오는 여정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나에게 여행은 삶 그 자체였다. 그것도 무려 24년간 이어진 생활 방식이었다.
나는 27살이 되던 해, 서울에서 퇴사 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첫 편도 항공권을 끊었다. 그때는 단순히 "한두 달 쉬고 돌아오자"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 여행은 끝날 줄 몰랐고, 나는 어느새 동남아시아, 인도, 유럽, 남미를 거쳐 여섯 대륙을 오가며 살아가는 40대 여행가가 되어 있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한 언덕 아래, 한 달 300유로짜리 스튜디오에서 보내던 나날은 아직도 생생하다. 오전에는 근처 카페에서 글을 쓰고, 오후엔 언어교환 모임에 나갔다. 태국 치앙마이에서는 작은 마을의 요가 공동체에서 생활하며 일출을 보며 명상을 하기도 했다. 그 모든 순간은 단순한 체험이 아닌, ‘살아있는 나’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무작정 떠났다고 해서 모든 것이 낭만적이었던 건 아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생긴 오해, 병원 한 번 가기도 어려운 나라에서의 건강 문제, 고립된 감정. 그러나 그 모든 불편함 속에서도 나는 나를 배우고, 세상을 배웠다. 중요한 건 유명 관광지를 얼마나 많이 갔느냐가 아니라, 낯선 곳에서 얼마나 진심으로 ‘살아봤는가’였다.
40대에 접어들면서 나는 여행의 방식을 바꾸었다. 20대에는 빠르게 많은 곳을 보고자 했다면, 지금은 한 도시에서 길게 머문다. 로마의 조용한 골목에서 매일 같은 빵집에 가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작은 공원에서 아침 조깅을 한다. 현지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동네 사람과 인사를 나누며 ‘그곳의 일원’이 되어간다.
중년의 현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40대가 된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젊음과 거리를 두게 되고, 사회는 점점 ‘안정’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친구들은 직장에서 중간관리자가 되어 바빠지고, 누군가는 자녀 교육과 집값에 대해 말한다. 그런 현실 속에서 ‘여행을 삶으로 삼았다’고 하면 대부분은 말한다. “부럽지만, 나에겐 불가능해.”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중요한 건 여행 그 자체보다, 스스로 삶의 방식에 대해 선택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체력적인 변화는 분명 있었다. 예전처럼 하루에 20km를 걷는 건 무리였고, 시차 적응에도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건강 관리를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요가와 걷기는 습관이 되었고, 정기적인 현지 병원 체크업을 받으며 스스로를 돌보는 법을 익혔다.
경제적인 부분은 더 현실적인 도전이었다. 한국에서의 수입 없이 떠나온 지 몇 년이 지나면서, 나는 프리랜서 번역, 글쓰기, 심지어는 현지 음식점 아르바이트까지 하며 수입원을 분산시켰다. 요즘은 온라인 강의 플랫폼을 통해 한국 학생들에게 여행 영어를 가르치며 수익을 얻고 있다.
혼자라는 외로움은 늘 존재했다. 누군가와의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건 어렵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결국은 헤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고독 속에서 나는 자신과 대화하는 법을 배웠다. 정적이 가득한 새벽, 모르는 도시의 창가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내 인생의 방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곤 했다.
중년이라는 나이는 어쩌면 인생의 재설계를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다. 지나온 과거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고, 남은 인생을 주체적으로 설계할 수 있다. 나는 지금도 나와 같은 고민을 가진 40대들에게 말하고 싶다. 안정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진짜 나’가 있는지 꼭 물어보라고.
경험공유로 세계 곳곳에서 마주한 진짜 인생들
24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수많은 사람과 도시, 문화와 마주했다. 그중에서도 나를 바꾸었던 순간들이 있다. 인도의 한 시골 마을에서는 3개월간 NGO 활동을 하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전기도 자주 끊기던 그곳에서, 나는 물질적 부족보다 사람의 따뜻함이 더 크다는 걸 느꼈다.
멕시코에서는 작은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선생님으로 일했다. 현지인 가정에서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식탁에 앉고, 시장에서 장을 봤다. 그들은 나를 외국인이라기보다, 마을의 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경험은 단순한 여행자에게는 절대 주어지지 않는 특권이었다.
아르헨티나의 와인 농장에서는 수확철에 일손을 돕기도 했다. 하루 8시간 넘게 포도를 따며 허리를 숙였지만, 그 과정에서 땀의 가치를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과 나눈 대화는 인생의 방향을 바꿨다.
“왜 이렇게 오래 여행을 해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나는 이렇게 답한다. “나는 여행을 하지 않으면 나 자신을 잃을 것 같아서요.” 여행은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더 겸손한 인간으로 만들어주었다. 거대한 문화 속에 휩쓸리기도 하고, 작은 마을 사람들의 미소에 눈물짓기도 하며 나는 다시 인간다워졌다.
이 글은 단순한 여행 후기나 체험담이 아니다. 40대라는 인생의 중반을 살아가는 한 인간이, 세계라는 거울 속에서 자신을 들여다본 기록이다. 여행은 나이와 상관없는 도전이며, 특히 중년 이후에야 비로소 ‘진짜 나’와 마주할 수 있는 여정일지도 모른다.
결론
안정된 삶도 좋지만, 때때로 낯선 곳에 나를 던져보는 용기가 필요하다. 나처럼 길 위에서 삶을 찾을 필요는 없다. 단, 삶의 중심에 진심을 두고 있는가. 그것을 자문하는 시간을 누구나 가져야 한다.
여행은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