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를 가야 할까’보다, ‘어디에서 머무를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되는 여행이 있다. 화려한 관광지를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리듬을 듣고, 현지인의 숨결 속으로 천천히 스며드는 여행. 동남아시아는 그런 여정을 가능하게 해주는 몇 안 되는 공간이다. 낮은 물가, 낯설지 않은 거리, 무엇보다 ‘지금 여기’에 머물러도 괜찮다는 허용이 있는 곳.
배낭 하나 메고 떠난다는 것은 단지 예산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속도로 살아가고 싶은가에 대한 선택이다. 이번 글에서는 그러한 선택에 가장 어울리는 세 도시를 소개한다. 베트남의 하노이, 태국의 치앙마이, 그리고 라오스의 루앙프라방. 이 세 도시는 지도에서 보면 그저 경로의 일부일 수 있지만, 마음속에선 오랜 시간 기억되는 여행지로 남게 될 것이다.
하노이 – 소란 속의 고요를 배우는 도시
하노이에 처음 도착하면 어지럽다. 오토바이와 차량이 뒤엉켜 규칙 없는 질서를 만들고, 이방인의 눈에는 모두가 어디론가 바삐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며칠만 머물러보면, 그 혼란은 도시의 리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혼잡한 거리조차 그들에겐 익숙한 일상이며, 그 안에는 생각보다 많은 ‘멈춤’이 숨어 있다.
하노이의 구시가지, 좁고 복잡한 골목에는 현지인들의 하루가 오롯이 담겨 있다. 국수를 말고 있는 아주머니, 작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 아침마다 반려견과 함께 걷는 노인들. 하노이는 배낭여행자에게 ‘어디에 있어야 할지’를 묻지 않는다. 그저 그 속에 스며들기만 하면 된다.
물가도 무척 저렴하다. 퍼 한 그릇에 2천 원, 길거리 카페에서의 진한 베트남식 커피도 1천 원이면 충분하다. 호안끼엠 호수는 도심 속의 쉼표 같은 존재로, 그 주변을 몇 바퀴 도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라앉는다. 하노이는 단기 체류보다는 ‘며칠쯤 살아보는 여행’에 더 적합한 도시다. 떠날 수 있지만 떠나기 싫어지는 도시, 그게 하노이다.
치앙마이 – 느슨하게 흐르는 시간의 도시
치앙마이는 속도감이 없는 도시다. 정확히 말하면 ‘속도를 재는 사람이 없는 도시’다. 이곳에서는 몇 시에 일어나야 한다는 강박도, 어디를 꼭 봐야 한다는 의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천천히 걸으며, 해가 지면 그대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이 모든 게 너무나 자연스럽고, 여행자에게는 그 자체로 치유가 된다.
도시는 크지 않다. 그러나 구시가지, 님만해민 거리, 도이수텝 산까지 연결되는 공간들은 다양하다. 가볍게 걸어서 사원을 찾고, 현지 시장에서 과일을 사며, 오후에는 로컬 카페에 앉아 책을 읽는 하루. 특별한 것이 없는데도 마음에 오래 남는 도시다.
치앙마이는 디지털 노마드와 장기 체류자들에게도 매우 인기가 많다. 코워킹 스페이스, 장기 임대 가능한 숙소, 저렴한 식비와 안정적인 와이파이까지. 혼자 떠난 이들이 외롭지 않게 지낼 수 있는 요소들이 충분하다. 무엇보다 이 도시는 여행자를 ‘손님’이 아니라 ‘임시 주민’으로 받아들인다. 누구든 치앙마이에서는 자신만의 속도로 살아갈 수 있다.
루앙프라방 –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도시
라오스 북부에 위치한 루앙프라방은 이 세 도시 중에서도 가장 조용하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도시는 개발과 자본의 속도에서 한발 떨어져 있다. 높은 건물도, 번잡한 상업시설도 없고, 사람들도 말이 없다. 모두가 조용히 각자의 하루를 살아간다.
아침 5시, 승려들의 탁발 행렬이 시작되면 도시 전체가 깨어난다. 여행자는 강변에 앉아 그 장면을 바라볼 수 있다. 해가 높아지면 메콩강을 따라 산책하거나, 오래된 프랑스식 건물의 그늘 아래에서 커피를 마신다. 오후엔 탁발을 보러 간 것도, 사원을 돌아본 것도 잊은 채 그냥 머문다.
루앙프라방은 무엇을 하려고 하기보다,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는 도시다. 배낭여행의 진짜 목적이 ‘자유’라면, 그 자유를 가장 정직하게 누릴 수 있는 곳이다. 인터넷도 느리고, 자극도 적고, 도시의 리듬은 사람보다 자연을 따른다. 이곳에서는 계획 없는 하루가 가장 알찬 하루가 된다.
배낭여행의 핵심은 ‘얼마나 가벼운가’가 아니라 ‘어떻게 머무는가’에 있다
하노이, 치앙마이, 루앙프라방은 모두 배낭여행자에게 친절한 도시다. 그러나 이 친절은 상업적 환대가 아닌, 삶의 여백을 내어주는 ‘공간으로서의 배려’다. 어느 곳에서도 크게 소비하지 않아도, 멋진 장소를 보지 않아도 여행은 충분히 깊어질 수 있다.
진짜 여행은 마음의 무게를 덜어내는 과정이다. 예산이 적다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일정이 길지 않다고 초조해할 이유도 없다. 이 세 도시에서 중요한 건 ‘내가 지금 어디에 있고,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뿐이다.
여행의 본질은, 목적지를 체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여정 속에서 나를 다시 만나는 일이다. 그 여정을 가능하게 해주는 도시들. 하노이, 치앙마이, 루앙프라방은 그래서 오늘도 누군가에게 가장 깊은 여행지로 남는다.